디르크 그로서 (2021) 철학 스승 떠돌이 개 보바 이야기
2024-05-23 Bibliography bib spirituality c220디르크 그로서 (2023) 삶과 사랑에 빠진 아이처럼: #일상 #신비주의자
우리가 알고 싶은 삶의 모든 답은 한 마리 개 안에 있다 - 젊은 철학도와 떠돌이 개 보바가 함께 한 14년, 디르크 그로서 (2021) 추미란
이 책은 어느 빼어났던 네 발 달린 스승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스승의 훌륭한 교수법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가르침에 의해 한 남자의 인생이 어떻게 완전히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 소개
“개 한 마리와 함께 있다면 스승은 필요하지 않다” 니체가 망치의 철학자라면 개는 전기톱을 가진 스승이다!
철학을 전공하고 여러 종교를 섭렵하면서도 삶에 대한 의문을 잔뜩 품고 있었던 이 책의 저자 디르크 앞에 여러 보호자와 동물 보호소를 전전하던 떠돌이 개 보바가 나타난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첫 만남부터 무지개다리를 건너기까지 14년 동안 보바는 생각이 너무 많아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 디르크에게 그동안 놓치고 있던 삶의 놀라운 비밀을 알려준다. 어느 땐 나뭇가지로 머리를 후려치는 것으로, 어느 땐 바보짓을 하고 있는 디르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르침은 충분했다. 복잡하고 어렵고 힘들고 문제가 많은 인생을 관통하는, 그야말로 도통한 지혜였다. 저자는 철학자 니체를 낡은 것을 타파한 ‘망치의 철학자’로, 보바는 ‘전기톱을 가진 스승’으로 빗대어 말하는데, 보바를 만나기 전 문제투성이였던 삶이 뚝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인생의 스승이 필요하다면 동물 보호소로 가라고 저자는 말했지만, 개를 키우기 여의치 않다면 이 책을 먼저 권해 드린다.
목차
들어가는 말
현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스승님과 지팡이 내버려둬! -덜 하면 더 즐거워 코가 촉촉한 보살 시작도, 끝도 없다 뭘 지키고 있는 거야 와, 또 밥이야! - 진정한 만족 공 좀 던져줄래? - 인생은 괴로운 게 아니야 매일매일 새로워 훈련은 무슨! 눈앞에 있는 걸 똑똑히 봐 가만히 앉아서 뭐하는 거야 눈이 내렸어 - 즉흥 명상 삶의 바다에서 수영하기 선 따위 갖다버리고 공놀이나 해 어릿광대 둘 마지막 가르침 - 초보자가 이별하는 법
나오는 말 감사의 말
부록 명상을 해보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 불교 용어에 대한 안내 참고문헌 주석
저 : 디르크 그로서 (Dirk Grosser)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정신세계와 명상, 불교에 대해 글을 쓰는 작가이자 음악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산책, 책, 개, 숲, 산, 바다를 사랑한다. 전 세계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와 명상 전통들에 조예가 깊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책을 출간했으며, 관련 CD를 발매했다. 덧붙여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하며 각자만의 길을 새롭게 보는 일을 돕고 있다.
고대철학과 신비주의자 소로우, 에머슨, 도가, 명상, 불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자기만의 경험에서도 많은 걸 배웠다. 국제 기독교 신비주의 명상 공동체에서 청소년 관련 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했고, 정신세계 전문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며, 다양한 음악 밴드에서 활동했다.
전통적인 단체에 소속되는 걸 싫어하지만 꾸준한 명상 수행으로 온갖 명상법의 좋고 나쁨을 두루 경험했다나. 쁘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 좋은 명상으로 판명되기도 했고 그 반대도 있었다.
두 딸의 아버지로, 독일 빌레펠트 근교 어느 목장에서 살고 있다.
역 : 추미란
동국대학교와 인도 델리대학교에서 인도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현재 독일에 거주하며, 영어, 독일어 출판 전문 기획 및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자기계발, 철학, 역사, 명상, 종교, 뉴에이지, 뇌 과학, 양자역학, 사진 분야에서 40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는 『우리가 알고 싶은 삶의 답은 한 마리 개 안에 있다』, 『나의 반려동물도 나처럼 행복할까』, 『보통의 깨달음』, 『어느 날 갑자기 무기력이 찾아왔다』, 『마음의 평안과 성공을 위한 4가지 신성한 비밀』, 『달라이 라마의 고양이』, 『두려움과의 대화』, 『원네스』, 『자각몽, 또 다른 현실의 문』, 『당신이 플라시보다』, 『나로 살아가는 기쁨』 등이 있다.
책 속으로
개울가에서 잠든 보바가 그 깊은 고요와 만족감을 나에게도 전달했던 그 순간, 나는 자연의 그 무엇도 계획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개울은 흘러갈 뿐이고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 나무는 바람의 멜로디를 알아차리고 춤을 출 뿐이다. 자연의 그 어떤 것도 인간적인 사고에 빠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가에서 ‘무위(無爲)’라고 했던, 행동 없는 행동을 할 뿐이다. (중략) 무위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도(道)가, 삶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두는 것이고, 모든 것이 스스로 자라고 꽃피우게 두는 것이며, 개울물 소리에 집중하고 자기만의 내면의 고요함과 자기만의 자연스러운 욕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원 벤치는 무위를 연습하는 데 아주 이상적인 공간이다. 세상 느긋한 어느 중국인이 인류 최초로 벤치를 설치하는 모습이 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 p.45~46
할머니가 내 옆 벤치에 앉으면 보바는 할머니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자신을 쓰다듬게 했다. 보바는 누구에게나 마음이 열려 있었고 그건 처음 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나는 종종 그러고 있는 보바가 내게 윙크를 보내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한테 이런 건 일도 아니야. 그리고 할머니도 아주 행복해 하잖아…. 작은 것들… 삶에서 중요한 건 작은 것들이라고….”
모든 감정 있는 존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겠다 엄숙히 맹세한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면 보바는 분명 ‘니르바나 아우스빌둥 센터(‘열반’ 직업교육 센터)?의 최고 모범생이 분명하다. — p.57
다르마에 대한 책을 한 권 읽는다고 해서 지혜의 번갯불을 맞고, 그 즉시 에고를 몽땅 버리고 모든 걸 초월한 듯한 미소를 짓게 되는 일은 대체로 없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주말에 열리는 불교 워크숍에 참석한다고 해서 금방, 또 반드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몇 년 동안 명상을 해도 놀라울 정도로 납작해진 엉덩이 외에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하는 동시대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도 자칭 무슨 무슨 선사라는, 이른바 스승들이 툭하면 나타난다. 그렇게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야 헌신적인 제자들을 모으기도 수월하고 돈도 많이 벌기 때문이다. 자칭 선사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놀라울 정도이다. 그들은 그런 칭호로 치장한 에고와 판타지 가득한 이력으로 추종자를 최대한 모으려 든다. — p.92
스승의 자질을 전혀 갖추지 못했지만, 수년 동안 아무 소득도 없는 면벽 수행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스승이 될 자격을 부여하고는 제자들과 의존관계, 혹은 그보다 더 나쁜 관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데 과연 누구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선불교 공동체를 찾아가려 한다면 나는 가까운 동물 보호소로 가보라고 권하겠다. 개들은 선불교 스승 자격증을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다. 네 다리로 서서 혀를 내밀고 있지만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대하고, 늘 털을 떨어트리지만 자신의 지혜를 아무런 대가 없이 전수해준다. 권력 관계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존재 자체로 깨달음을 준다. 어디서든 명상하며 되지도 않는 법석은 떨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 말이 없는데도 걸어 다니는 공안 그 자체이다! 그리고 자신의 에고보다 당신에, 그리고 당신의 기쁨에 더 관심이 있다! 진짜 솔직히 말해보자. 당신은 이 이상 뭘 더 바라는가? — p.93~94
안락의자도, 프리스비도 과거일 뿐이다. 더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돌아보고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내일 당장 나가서 새 프리스비를 사다줄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나한테서 용돈을 받더라도 나에게 새 안락의자를 사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보바는 내일에 대해서도 어제만큼이나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하는 바로 지금 이 시간일 뿐이다. 보바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그네 삼아 타고 있는 벌레들을 관찰하고, 나는 공원 벤치에 늘어져 편하게 쉬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시간 말이다. — p.109~110
개는 전혀 괴로워하지 않는다. 유리 조각을 밟으면 개도 통증을 느끼지만 그렇게 다친 후 그날 내내, ‘왜지? 신이시여,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나요? 오늘 아침에 소시지를 훔쳐 먹은 것 때문인가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찾아왔을 때 물어버린 것 때문인가요?’ 같은 생각으로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며칠 동안 붕대를 감고 절뚝거리며 걸어야 한다고 원통해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공원에서 만나곤 하는 푸들 아줌마가 이제 자신을 못생겼다 생각하지 않을까, 혹은 개 훈련소에서 승승장구하던 경력에 흠집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순간 아프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 p.115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들은 보바 같지 않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곧 진리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환생설에 백 퍼센트 설득당하지 못하면 곧 ‘진짜 불교도가 아닌’ 게 된다. 성경의 특정 구절을 ‘단지’ 하나의 비유로 이해한다고 하면 당장 질타를 받고 교회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혹은 요가 박람회에 가서 소시지를 한 번 팔아보시라. — p.159
불교 선사라면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다가올 감정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것에 휘둘리는 일 없이 잘 관찰할 수 있다고 해서,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일일이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감정 없는 나무토막인 것은 아니다. 변화를 잘 받아들인다고 해서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되지는 않는다. 태연하고 침착한 것이지 냉담한 것이 아니고, 선(禪)은 감정 없음이 아니다. 감정을 거부하는 사람은 감정을 두려워하게 되고 점점 자신의 감정을, 나아가 자기 자신을 모르게 된다. 선 수행을 위해 감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선사는 없다. 감정을 포함한 내면의 삶을 거부하고 보살피지 않음은 사실 불교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 p.187
보바에게 감정이란 심리분석가의 소파에 앉아 분석과 분석을 거듭해야 하는 것, 그런데도 점점 더 헷갈리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정직하게 느껴보는 것이었다. 보바는 삶과 함께 흘러갔고 그 흐름을 더할 수 없이 자연스럽게 탔다. 삶의 흐름을 타다보면 삶의 강에 난데없이 만곡부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럼 물이 탁해지기도 하고 진흙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차가워지기도 한다. 그런 곳에서 불행하다 느끼는 건 당연하고 그런 감정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새 물이 유입되고 물은 다시 맑아지고 햇살이 더 따뜻해지며 물가의 경사면은 아름다운 풀과 꽃으로 뒤덮이고 졸졸, 꿀떡꿀떡, 모든 것이 평화롭게 되기도 한다. 머리가 똑바로 박힌 개라면 진흙투성이 차가운 물이 든 밥그릇을 머리에 올리고 떨어트리지 않게 걸으며 계속 나쁜 기분을 맛보지는 않을 것이다. — p.188~189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관습과 거짓 친절함에 얽매여 있었던 것 같다. 둘 다 보바에게는 사료 찌꺼기만큼도 가치 없는 것들이었다. 그 자칭 힐러 무리가 건네준 참고 자료들은 바로 휴지통에 버려졌다. 잠깐 소각 의식을 치러볼까도 싶었지만, 사무실 내 안전 수칙을 고려해서 그만두었다.
그날 내가 배운 것은 ‘모든 헛소리를 다 들어주면서 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대단한 영적 관계 속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언짢은 상황이라면 친절하고 단호하게 끝내도 괜찮다. 머릿속으로 무인도를 상상하면서 공손하게 머리만 끄덕이는 것보다 이것이 더 정직한 것이다.
삶[道]은 무자비해서 낭비된 시간은 절대 돌려주지 않는다. 보바는 삶의 강 속을 수영하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누가 자기를 물고문하는 것까지 그대로 두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대하고 솔직한 것이 우리 신경과 에너지를 아끼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나는 깨달았다. 현명하기 이를 데 없는 보바처럼 사는 것이 진정 하나의 대안이 되어 주었다. 내가 자주 보게 되고 나 자신도 자주 드러내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대한 대안 말이다. — p.193~194
많은 영적 전통에서 안타깝게도 그런 소속감이 극도로 중시되어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소속감만이 존재하고 애초의 가르침과 진정한 해방은 등한시된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해서 둘도 없이 옳은 길을 가는, 엘리트 그룹에 속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렇게 그 길을 가는 행위가 아니라 그 길 자체가 추앙된다. 하지만 그 길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돌아서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옆길이나 남들은 가지 않는 오솔길을 가게 될 수도 있다.
선의 길을 가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원래 야생의 오솔길이었던 선의 길에 아스팔트가 깔려버렸다. 하지만 모방을 통해서, 혹은 자신만의 경험을 그 어떤 전통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으로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 p.204
보바는 그릇된 존경심을 전혀 갖지 않았다. 간(肝) 소시지로 만들어진 거라면 그것이 붓다라고 해도 주저 없이 몇 분 안에 먹어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웃의 고양이와 마주칠 때면 어찌나 호의적인지 그 고양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 들어와 보바의 담요 위에서 보바와 같이 나란히 누워 기분좋게 졸다가 가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보바는 십자가상에도 기꺼이 오줌을 쌌을 것이고 그 이웃 고양이가 겁도 없이 우리의 산책길을 따라올 때면 늘 잘 보살펴줘서 다른 개들이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 보바에게는 모든 영적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뽑아내고 그 가장 중요한 것을 실천하며 사는 능력이 있었다. — p.213
개와 함께 살다 보면 개가 얼마나 관대하고 친절하고 열려 있는지 보게 된다. 개와 함께 놀다 보면 공을 던지는 행위, 함께 잔디 위를 구르는 행위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자신을 잊고 그 순간 프리스비, 잔디, 태양이 된다. — p.228
출판사 리뷰
“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개가 선사(禪師)가 아니라면 누가 선사란 말인가!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생물은 무엇일까? 여러 답이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로서 모든 생물 위에 군림하지만 자기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한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며 상처 입고 화를 내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본디 어디에도 없던 생각을 무수히 지어내며 ‘인생은 왜 괴로운가’ 묻고 또 묻는다. 생각이 많아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동물은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뛰어놀 때는 열심히 놀고, 배고플 때는 밥을 먹고, 자고 싶을 때면 아무 데서나 자는 고양이나 개를 가만히 지켜보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고 나도 동물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 싶다. 생명을 지닌 같은 존재인데 왜 인간은 고양이와 개보다 행복하지 않은가.
이 책은 한 마리 개와 14년간 동거한 한 남자가 그 개에게서 배운 삶의 진실을 담고 있다. 나는 누구이고 삶은 무엇인지, 그 의문을 해결하려고 철학을 전공하고 여러 종교를 전전하던 저자 앞에 어느 날 갈색 털을 가진 개 ‘보바’가 나타난다. 사료를 챙겨 주고 산책을 시켜주고 잠자리를 봐주고 텔레비전을 함께 보고 일터에도 함께 출근하고, 그저 그런 일상을 보바와 함께 하면서 저자는 어느 날 그동안 풀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즐기라는 것, 모든 존재를 열린 마음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보라는 것,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연스럽게 두라는 것, 나아가 이 우주에서 먼지에 불과한 생명의 존재 이유를 감동적으로 터득한다. 어쩔 땐 나뭇가지로 머리를 후려치는 것으로, 어쩔 땐 쓸데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디르크를 그저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으로 존재의 이유를 깨닫게 해준 보바. 그가 선사(禪師)가 아니라면 누가 선사란 말인가!
스승이자 친구로, 종(種)을 떠난 우정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니 외롭지 않다
1991년에 태어나 1992년에 저자를 만나기 전까지, 보바는 1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네 번의 파양과 두 번의 동물 보호소 생활을 거친 떠돌이 개였다. 저자가 보바를 만나게 된 것도 이미 반려견 두 마리를 키우고 있어서 보바를 감당할 수 없었던 친구가 입양을 제안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연은 따로 있었다. 다른 보호자들로부터는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라는 평가를 받은 보바였지만 저자는 첫눈에 ‘영혼의 단짝’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인연은 보바가 췌장암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너기 전까지 14년간 이어졌다.
14년 동안 둘은 늘 붙어다녔다. 저자는 조깅을, 보바는 산책과 공놀이를 즐기던 공원은 물론이고, 저자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주유소, 남프랑스의 어느 사원에서 열린 티베트불교 캠프…, 어디든 함께했다. 저자가 자기 일을 할 동안 보바 역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편안히 지냈다. 물론 보바가 ‘하고 싶은 대로’ 한 일들은 반려인인 저자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낯선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난감하게 만들고, 아끼는 안락의자를 물어뜯어 화가 나게 하고, 진흙탕에서 뒹굴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등. 그러나 이 아찔한 사건을 통해 저자는 어떤 철학과 종교에서도 배우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낯선 사람을 배척하기보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물건을 적게 소유하니 이사하기가 편해졌다며 생각을 긍정적인 모드로 빠르게 전환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보바를 ‘네 발 달린 스승’, ‘코가 촉촉한 보살’이라고 추켜세우고 스스로는 ‘모자란 제자’로 칭할 만큼 저자는 보바의 행동을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관찰했다.
근본적으로 이 책의 핵심은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 개가 나눈 깊은 교감에 있다. 생명을 가진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는 어떤 생명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사랑한다면 이 세계를 따듯하게 만들어갈 수 있음을,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것을 분석하는 철학도의 습관을 깨뜨린 네 발 달린 스승에게서 배운 삶의 비밀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철학적 질문과 불교, 여러 영성가들의 말을 보바와 함께 풀어간다. 공(空), 무아(無我), 사성제, 윤회, 도(道)와 선(禪). 그리고 붓다의 여러 가르침과 틱낫한, 중국의 한산 스님, 조주 선사, 앨런 와츠, 스즈키 순류, 리처드 로어 신부 등. 머리로만 익히고 알았던 철학 이론과 영성가의 말을 보바의 행동을 통해 새롭게 경험하고 핵심을 뚫은 것이다.
철학 전공자로 모든 것을 분석하고 해부하고 범주화하는 습관에 길들어 있던 저자에게 본능대로 움직이는 보바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살아 있는 스승이었다.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갈 때면 낯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것도, 또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흔들다 저자의 머리를 세게 때린 것도, 아끼는 안락의자를 다 물어 뜯어놓은 것도 ‘한심한 제자’인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느꼈다. 이를 통해 저자는 비로소 지금까지 어떤 틀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머리로 꾸며진 가짜 현실 속에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과거의 상처로 힘들어하고 다가올 미래를 불안해하며, 그것이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것이라고 애써 의미 부여를 해온 자신을 발견했다. 진흙을 잔뜩 묻혀온 보바가 욕실을 온통 추상화로 가득 채우고는 활짝 웃으며 잔뜩 화가 난 저자에게 안기던 날, 보바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인간은 그렇게 산다니까!”
‘냄새날 때가 있는가 하면 목욕할 때도 있는 거지. 삶은 늘 새로운 찰나의 연속이야. 누가 공을 던져주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러지 않는 때도 있어. 어느 날은 해가 나고 어느 날은 비가 와서 다 젖게 되는 게 삶이야. 그렇게 변하는 삶에서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괴로워지게 되어 있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23쪽)
개가 철학자이자 도통한 선사라는 증거 7
- 니체가 낡은 것을 타파한 ‘망치의 철학자’라면 개는 ‘전기톱을 가진 스승’이다. 인생이 지루한 일상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삶을 완전히 뒤집어 보게 한다.
- 개에게는 인간처럼 언짢아하고 모욕을 느끼는 에고가 없다. 또한 자기 삶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개는 자신의 지혜를 아무런 대가 없이 전수해준다. 주인의 기쁨에 더 관심이 있을 뿐이다.
- 개와 산책하노라면 태연히 자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성공한 삶임을,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나무, 구름, 흐르는 물, 별들의 움직임, 그리고 개와 인간…, 우리는 모두 자연의 현상이며 그 흐름 속에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 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곧 진리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삑삑이 공을 좋아하지만 다른 개가 소리 안 나는 공을 더 좋아한다고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 개는 매 순간 그 자리에 있다. 정신없이 공을 쫓아 달리다가도 다음 순간 더 할 수 없이 평온하게 잔디밭에 엎드려 쉰다.